달리 할 일이 거의 없거든요

사무실 자리에 앉으면 30분짜리 모래시계를 돌려둔다. 집중 하기 전 웜업을 한다는 핑계를 두고 딴짓을 마음껏 하는 시간이다. 당장 해야할 ‘딴짓’이 있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출근 버스에서 읽다만 소설의 한 장을 끝내기. 혹은 한참 재미있게 미래를 논하다 중단된 제미나이와의 대화.

해야할 일이 없을 땐 일단 숨을 한 번 크게 고른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숙 훑는다. 책상 위 먼지를 털어줄 때가 되진 않았는지, 듀얼 모니터 앞에 있는 잡동사니들, 예를 들어 립밤 두피 마사지기와 같은 것들이 내 시선을 거스르지는 않는지, 가습기에 물은 적당히 채워져있는지, 그리고 내가 며칠간 내달린 만큼 달력에 색을 잘 칠하고 있는지 체크한다.

무기력했던 시간이 있었다.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쉽사리 깨고 나오지 못한 시간. 자각한 건 1주일 정도이다. 새벽 기상이 유독 어려웠다. 겨울 동안 해오던 온갖 종류의 운동들, 수영, 새벽 달리기, 그리고 요가 그런 것들을 하나도 해내지 못한 한 주였다. 눈이 떠지면 다시 감고 알람이 울리면 스누즈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출근 시간이 임박하면 겨우 몸을 일으켜 민폐를 끼치지 않을 만큼의 외모를 만들고 문밖으로 나서기를 며칠. 그런 한 주를 떠올리며 달리기 달력에 색을 칠했다. 한 주 달린 거리를 합산해보니 40키로가 넘었다. 숫자를 보고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분명 게으르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달리 할 일이 거의 없거든요”

도러시아 브룩이 <미들마치>에서 교회 건축에 힘쓰려한 것. 처음부터 진정성있고 일관되게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려고 한,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그녀의 끈기. 물론 관계에 있어서는, 캐소본과의 결혼에 있어서는 그녀의 그런 태도가 어쩌면 독이 되었을지 몰라도 굽히지 않는 자신의 지조만큼은, 결국에는 미들마치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마는 것. 그녀는 그저 “달리 할 일이 거의 없거든요”라는 말로 상대가 자신에게 마음의 빚의 무게를 지지 않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녀가 이루고자하는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마을을 만드는 데 자신의 재산과 유산을 쓴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에 하고 있는 작은 행동이 나에게 또 언젠가 어떤 형태로 누군가에게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하기에.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 속 빵집 주인이 매일 빵을 굽듯이. <미들마치> 속 도러시아에게 교회 건축이, <태엽감는 새>의 너트메그에게는 옷을 만드는 일이 “달리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계속 하고 있는 열정의 물성이라면, 나에게는 무엇이 꺼지지 않는 열정의 불꽃일까? 그것이 나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돕고 있을까? 그러면 좋겠는데.

그래서 달린다. 그래서 오른다. 거리를, 강가를, 공원을, 북한산을, 인왕산을. 왠지 모르겠지만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시 읽고 싶어졌다.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우측 작은 석탑 위에
이 돼지는 누가 어떤 이유로 가져다 놓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