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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언니, 그건 얼굴 작은 사람들 거야. 성인은 대형 써야 해.” 나는 중형을 내려놓고 대형을 집어 들었다. 결제를 하고 나왔다. 약봉지를 들고 사무실까지 걸어가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스크는 컸다. 왜 중형 말고 대형을 쓰라고 했을까. 얼굴이 커 보였나. 아니면 얼굴이 커진 건가. 예전엔 얼굴 작다는 말도 들었는데. 약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뒷면으로 뒤집었다. 나이가 쓰여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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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한 손에 스틱, 한 손에 폴라포
장수 트레일런이 2주 남았다. 마지막 훈련답게 15km 코스로 트레일 러닝을 했다. 인접한 두 개의 산을 오르내리는 훈련이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3분의 1도 채 되기 전에 숨이 가팔라졌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초반 업힐부터 달리는 바람에 가파르게 높아진 심박수가 잠잠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산 이름의 특징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 산 이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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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할 일이 거의 없거든요
사무실 자리에 앉으면 30분짜리 모래시계를 돌려둔다. 집중 하기 전 웜업을 한다는 핑계를 두고 딴짓을 마음껏 하는 시간이다. 당장 해야할 ‘딴짓’이 있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출근 버스에서 읽다만 소설의 한 장을 끝내기. 혹은 한참 재미있게 미래를 논하다 중단된 제미나이와의 대화. 해야할 일이 없을 땐 일단 숨을 한 번 크게 고른다. 그리고 테이블 위를 숙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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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트메그와 비밀의 문
새벽 6시 알람이 울린다. 스누즈를 끄고 20분을 다시 맞춘다. 그 사이 인스타그램 스크롤을 내린다. 잠을 깨기 위한 가장 익숙한 방법. 20분이면 된다. <태엽 감는 새>에서 너트메그는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옷을 디자인했다. 그녀의 비밀의 문은 무언가를 창조했다. 나의 비밀의 문은 폰 스크린 속이다. 이것은 무엇도 창조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달리러 나간다. 경복궁을 한 바퀴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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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월자였다
“이것이 인증의 폐해예요.” 그녀가 말했다. 1시간 넘도록 버스를 타고 도착해 15분 가량 쉼없이 오르막을 올라 다다른 곳. 방정환 묘터 앞이었다. 블랙야크에서 진행하는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셀카모드로 표지판과 내 모습을 담았다. “근데 묘지가 어디지?” 내가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공원에는 태극기가 가득 걸려있었다. 달리며 지나친 한용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