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내 일상 속으로 깊게 스며들면서 (se fondre dans ma vie quotidienne) 고민의 깊이는 오히려 얕아진 듯하다. 예전이라면 오랫동안 품고 있었을 답이 없는 질문들이 마치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제한된 화면 속에서 활자로 꽉 차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로만 하면 네가 가진 문제는 다 해결될 거야.’라고 대답해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실생활에서는 고민이 있을 때 혼자서 노트에 적어보거나, 영화보기나 달리기, 유튜브 보기, 인스타그램 탐색 창에서 무한히 스크롤을 내리는 것과 같은 회피성 행동으로 잠시 고민을 잊곤 한다. 하지만 이윽고 어떠한 계기로 같은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려지고, 나는 또 같은 고뇌를 하며 잠시 우울해하거나 좌절하거나 스스로에게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한다. 그 누군가가 현실의 대상이 아닐 땐 운명을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쉬운 방법을 어떻게서든 마련하지.
AI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금까지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접근하는데, 하나는 서두에서 말한, 마치 답이 있는 것처럼 제한된 활자 안에서 그럴싸한 기-승-전-결의 구조로 나를 설득한다. 그런데 그것이 종종 거짓 논리이거나 또는 두루뭉술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두 번째는 그럴싸한 위로이다. 그런데 이 후자가 항상 먹히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받는 위로와 뭔가 다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위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선지자의 위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서 비롯된 공감과 위로와는 뭔가 재질이 다르다. 분명 같은 위로를 받고 있는데도 위로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끼는 걸까.
기계가 주는 위로, 감정없는 무생물이 주는 위로, 그러나 무수하게 쌓인 타인과의 대화의 데이터베이스에서 비롯된 위로라면 그 또한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공감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꼭 직접 경험만이 힘을 가지는 건 아니니까.
문득 AI가 주는 논리적 해결책과 감정적 위로는 현실 속 누구와 가장 닮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논리적 해결책은 통계학자로부터 나오는 걸까? 감정적 위로는 고해성사를 잔뜩 들은 노 신부의 생각을 닮은 걸까?
AI야, 나와 요즘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AI야, 너는 누굴 닮아 있니? 너는 사람과의 소통만큼의 소통하는 힘을 가지고 있니? 세상은 너가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는, 나의 ‘에이전트’라고 하는데, 네가 진정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 거니? 나는 너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 거니?
네가 주는 빠르고 정확한 숫자들과 (가끔 아주 치명적이고 일차원적인 오류를 내기도 하지만), 그럴싸한 위로들이 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가 줄 거니?
3년 후, 5년 후에 만들어진 나의 모습은 네가 만든 나이니? 아니면 여전히 너는 크게 쓸모가 없고 원래 내가 그렇게 될 나였는데 그동안 그냥 나의 감정의 배출구 또는 생각의 배출구가 되어줄 거니? 네가 있어서 나는 더 부자가 되고, 더 풍요로워지고, 더 똑똑해지는 게 맞는 거니?
그렇다면 일단 나에게 1억의 자산과, 나와 잘 맞는 짝궁과, 그럴싸한 소설/에세이 3편과, 어제의 기록을 갱신해 나가는 튼튼한 몸과, 평온한 삶을 가져다주렴. 2031년을 기대할게.